이미 19세기의 칼잡이 잭에서 부터 아메리칸 사이코에 이르기까지 연쇄살인이란 부자국가의 기득권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우아한 취미라는 이미지를 터득해왔다.
왜 꼭 그러한 계급에서 그런 악취미가 발생하는 지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지독한 트라우마로 인해 사이코패스급으로 성장한 저소득층에서 범인이 발생하는 우리나라에 비춰보면 다소 작위적이고 인문학적인 포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천인공노해도 모자를 듯한 이 범죄행위는 그러나 묘한 구석이 있다.
연쇄살인범을 처절히 뒤쫓는 형사의 시점에서 그려진다면 얘기가 다소 다르지만 시점이 세련되고 지능적인 연쇄살인범으로 옮겨가면 무의식적인 동조감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다.
감성에 의한 우발성 범죄가 주는 역겨움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계획되는 미션에 대한 성취욕으로의 본능적 동조 같은 것인지...그래서 성격상 남성에 적합한 범죄인건가...상황이 그 쯤되면 유사성을 흘리는 연쇄살인은 도덕률 위반이라기 보다 경찰 눈 피해 무단횡단하는 스릴 정도로 대상화 되어 버린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아쉬워야 할 게 별로 없는 기득권 남성이라면 그 대상화가 쉬울거라는 점에서는 그 이론이 설득력있게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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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묘하고 독특한 연쇄살인범 영화 미스터 브룩스는 바로 그 지점에 놓여있다.
주인공의 우아하고 세련되며 그럴듯한...분열적 자아까지 동원해서 당위성을 설파해대는 턱에 설득력이 있기 까지한,  연쇄살인 전력이 완벽히 감추어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며 연쇄살인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피워대던 담배 쯤의 기호품으로 포장되는 게 가능하다고 관객을 믿게 만들어 버린다.
자자...죄의식만 극복한다면 모든 범죄는 이성적으로 말끔하게 처리될 수 있단 말이야...머리를 써보자구...그리고 정말 주인공은 악의적 위기에 빠진 선한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 하듯...그 지점에 통렬하게(?) 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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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률에서 해방된 인간은 결국 허망한 우아를 떨거나 고약한 취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마치 너도 지금 응원하고 있지? 인간 다 똑같애 라는 주인공의 속삭임에 속마음을 들켜버리고 나면 그렇담...무엇으로 이 위험한 접근이 분쇄될 수 있는 건가하는 의구심에 휩싸인다.
그 해답은 너무나 직설적이라 그 위험한 동조만큼 설득력을 가져온다.

결국 내가 흘리고 다니는 국물에 내 옷을 더럽히고 말 수 밖에 없다는...
의지와 통제력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유한적 상황, 그로인해 엽기적 댓가를 치르고 얻은 위안조차 담배피고 나서 폐암을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에 영원히 구속될 수 밖에 없음을...
주인공의 마지막 기도 소리에서 엿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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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웬수로구나


뭐랄까...대단히 지능적인 관객과의 도덕률 게임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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