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다소의 스포일러가 있음>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 막상 하려고 보니 쉽지가 않다.

먼저 영화를 처음 보게된 시점은 이렇다.
1994년 봄, 20대 초반의 나는 이런저런 실패와 목표상실의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박에 치여 주체못하는 폐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긴장감과 에너지를 잃고, 흘러버리는 시간에 두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누군가 진짜 인생의 쓴맛을 니가 알기조차 하느냐고 묻는다면 같잖은 투정 따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시적 안목과 성찰 따위가 당시 내게 먹혔을 리 없었다.

그때 나에겐 여친이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통념 따위를 가당치 않게 여겨버리는 그녀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다. 의욕의 방향을 상실한 나에게 그 막돼먹은 에너지가 좋기는 했지만 그러기에 이 관계가 시간적 한계가 있으리란 생각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자살의 암시를 덕지덕지 흘린 일기장을 남기고 사라진 친구를 친구의 아버지와 함께 여기저기 수소문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이렇게 부유하느니 차라리 혹사당하면 정신을 차리겠지 싶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순진한 마음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입대 전에 구두점을 찍을 작은 이벤트라도 하나 하고 싶었다.
느닷없이 부산 바람을 맞으러 가기도 하고...그러다가
우연히 호암아트홀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 앞 동시상영관의 레퍼토리에 지치기도 했고 찾아보기 힘든, 여기저기 회자되던 전설의 작품들을 볼 기회라 여기고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80년대 에로물에 지친 나에게 60-70년대 영화들은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가 퇴보하기로 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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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단연 군계일학이 바로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철과의 만남이었다.
저항하지도 순응하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끝없이 추락하지도 못한 채 영악한 영자에게 당하기만 하면서 고래잡는다며 자살하러 간 친구의 행방도 모른 채 입영열차에 실려 떠나는 병태...
어찌! 영화 속 인물이 아닌 마치 자화상을 보는 듯한 지독한 페이소스에 풍덩 젖어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바보들의 행진의 여운을 진하게 뭍히고서는 입대를 했었더랬다.

시키는 대로 하고 살면 쉽게 살 수 있는 인생을 굳이 어렵게 돌아가려하고
답도 보이지 않는 의문들 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들고
뭘 해야될 지 모르겟지만 뭐라도 하고 있어야하는 허전함과 충만감이 사이에서 시달려야 하는 게 청춘이었다.
거대한 사회모순조차 청춘들에게 본질적으로 남기는 건 모순 그 자체라기보다는 혼란감의 증폭이 주는 고통이다.
누가 그 모순을 안다고 떠드다면 그건 기만에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그 진심이 장면장면마다 우러나오기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자살과 도피로 사라져야 하는 병태와 영철은 무책임한 신파가 아니라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다.
그 메아리 같은 질문은 아는 척하지도 궁상떨지도 자신을 놓아버리지도 않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성찰과 관조를 배우기 위한 수업료라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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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떼고 슬픔을 말하는 저 능청스러움이 이 영화의 트레이드마크

영화는 결과론 적으로 일종의 하이 퀄러티 패키지가 됐다.
어느 한쪽을 힘주어 말하려지 않는 연출의 시선, 유효적절하게 끈적거리는 음악, 정형성을 삐긋삐긋 엇나가는 영상, 비주얼마저 진정성이 느껴지는 캐스팅...결국 청춘영화들이 트랜드의 함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청춘의 심장에 대한 '진심'이다.

하길종 감독은 대중상업 아이템을 해야했다는 것과 난도질에 가까운 검열 덕에 자신의 필모에서 이 영화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데...난 그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가 더 빛나 보인다. 그의 의도대로 관념의 발현으로만 치달았거나 소설대로 다소 신파스러운 청춘풍속도가 되었다면 이 만큼 복합적인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을꺼다.
비록 알고 봐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검열 덕에 데모 장면 대신 생뚱맞게 들어간 운동경기 장면이, 잘 나가다가 뚝뚝 끊어져 버리는 편집상의 단절감이 오히려 의도된 듯한 메세지로 읽혀지기까지 한다.


제대를 하고 영화를 본격적으로 파고들면서 이 영화에 대한 갈증도 함께 커갔는데 그 어디에서도 볼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힘들게 홍대앞 VHS 카피가게에서 찾아냈는데 복사 신청을 해놓고 일주일 후 찾으러 가니 망해서 문을 닫아 버렸다.
영상 자료원을 찾아가 틀어달라고 할 주변머리도 없는 관계로(가능한 건지도 모르지만) 점점 희미해져가는 첫사랑의 추억이 되어가기만 하다가...
얼마 전 피투피 사이트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의 감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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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페이소스는 이미 관조할 나이라고 생각하는데도...역시 이장면에선 눈물이...

새벽녘에 감동어린 관람을 마치고 조악한 화질과 맞지 않는 화면비율에 소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파고들어가보니...이런, 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무료 VOD로 볼 수 있게 해놨다. 아마 이 소스는 그 화면을 받은 것 같다.

다시 보니 영자역의 이영옥 너무 이쁘다.
예전의 내 페이소스엔 영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나...
그런데...이 이영옥이란 분...지금 경기도에서 나이트클럽 하신단다....헛헛...이것마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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